덕수궁 탐방
▣ 덕수궁의 역사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선조 26)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광해3)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다. 그 후 광해군은 1615년(광해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의 미국대사관저 건너편 서쪽에는 중명전을 비롯해 황실 생활을 위한 전각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 지내는 선원전이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을 설치하여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이후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이 철거되었고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1920년부터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하여 궁역이 크게 줄어 들었으며, 1933년에는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이처럼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이었다.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으로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던 것을 1906년 7월 15일 수리 시 대한문이라 개칭하였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2차 도로확장 공사 때에 담장만을 궁내로 이전하여 도로상의 한복판에 분리 폐쇄되어 있다가 1970년 8월 21일 현 위치로 이설 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준공을 보았다. 2005년에 해체 보수공사를 하였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하여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1902년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되었으며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있다.
고종황제께서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시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셨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으셨다. 본래는 중층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1897년에 건립하였으나 1904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 시 흥천사종과 보루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보루각자격루(국보제229호)
물을 보내는 파수호(播水壺)가 3개, 물받이인 수수통(受水筒)이 2개 남아 있는데,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에 의해서였다. 장영실의 물시계는 정해진 시각이 되면 격발장치를 건드려 쇠알이 굴러가서 여러 운동을 하게 만든 것이다. 종·북·징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는 장치는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흥천사종(보물 제1460호)
연혁:이 종은 1462년 7월 이태조(李太組)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종은 신덕왕후 능의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년(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년(1747년)에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 한일합방 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겼다.
1936년 8월 21일 기공하여 1938년 6월 5일 준공하였으며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중이다.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풍의 석조로 건립된 건물이며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으며 영국인 "데빗손" 감독 하에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으며, 특별한 건물명칭은 없이 "석조전"으로만 전해 온다. 고종(高宗)황제는 이곳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8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했고 1948년~1950년 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엔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건물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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