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태종 12)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돌기둥만 남은 것을 1867년에 재건하였다.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이며, 넓이 931㎡의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우고 비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마룻바닥은 중앙의 3칸 중궁(中宮) 부분이 가장 높고, 그 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쪽 20칸은 다시 한 뼘쯤 더 낮은데,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품계의 관료들이 앉았다
왕실의 생활이 묻어 있는 곳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을 침전(寢殿)이라고 한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고종명(考終命,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의 오복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강녕’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여졌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정(井)’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구성하여 한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을 하였다.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1440년(세종 22)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아미산 정원과 굴뚝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계단식 화단과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 낸 굴뚝(보물 제811호)이 아름답다. 1917년에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일제는 목재를 조달한다는 명분으로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현재의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왕실의 필요에 의해 내전 가까이 지었던 건물들
흠경각은 농업 발전을 위해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고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자 했던 왕의 고민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건물이다. 세종은 1438년에 흠경각 건립을 명하고 여기에 옥루기륜(玉漏機輪), 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의 시간 측정기구와 천문관측기구인 간의(簡儀)를 만들어 설치했다. 경복궁 내전 깊숙이 위치해 주로 불사(佛事)를 행하던 함원전도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는 유교 국가인
데도 세종 등 여러 왕과 왕비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몇 차례의 소실을 거쳐 1888년(고종 28)에 복구되었으나 1917년의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가 창덕궁 재건을 위해 뜯어 갔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영역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 있다. 이나마도 일제가 동궁터에 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흥복전은 빈궁전(嬪宮殿)으로서 중궁전인 교태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되 격을 한 단계 낮추어 지었다. 그런데 신정왕후가 이곳 흥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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