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고(醬庫)
함화당 서쪽에는 궁중 연회와 제례에 쓰이는 장을 보관하던 장고가 있다. 북궐도형에는 함화당과 집경당
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 두 곳에 장고가 있는데, 이 중 서편의 장고를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2005년 복원했다. 경사지를 활용한 계단식 장독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2007년 전국에서 수집한 독을 지역과 용도별로 나누어 전시하고있다
12. 향원정(香遠亭)과 건천궁(乾淸宮)
고종을 위해 지은 궁 안의 궁
함화당과 집경당 북쪽 후원 영역에는 향원지라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가운데 향원정이 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된 후 지금처럼 남쪽으로 놓았다. 향원정은 세조 때 세운 취로정 터에 건청궁을 지으면서 조성한 것이다.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건청궁이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73년(고종 10)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건청궁은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왕의 처소인 장안당,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졌으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에 헐린 후 1939년에는 이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향원정은 보물 제17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성황후의 비극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한다. 이에 친러정책을 구사하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성황후는 건청궁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깡패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찔러 죽이고 그 시신마저도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13. 집옥재( 集玉齋) 일원
청풍(淸風)과 조선풍의 조화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1885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1891년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協吉堂)등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풍 건물로, 밖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2층으로 되어 있다. 팔우정(八隅亭)은 팔각 누각으로 기둥 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반면 협길당은 고유한 조선식 건물로 온돌방을 두어 휴식 장소로 사용했다.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 연결되며, 각각의 특색을 지니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14. 태원전(泰元殿) 일원
왕자 출신이 아니었던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과 함께 왕권 승계의 정통성 시비에 대응해야 했다. 그 일환으로 태원전(泰元殿)을 지어 역대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모심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1868년(고종 5)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원전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이후에는 명성 황후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殯殿)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문경전(文慶殿)은 위패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건립했다. 주변에 공묵재, 영사재 등 의례용 건물도 들어서 신성한 일곽을 이루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이곳은 청와대가 가깝다는 이유에선지 5・16쿠데타 이후 청와대 경호부대가 들어섰으며, 1979년 이른바 ‘경복궁 모의’를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2006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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