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이다. 북으로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진 한양(서울)의 중심이었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중건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과 관청들, 왕족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과 건물들, 휴식을 위한 정원 시설들을 조성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했다.
1. 광 화 문
옛 영화를 짐작할 수 있는 4대문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法殿, 正殿)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궁궐전각 밑에 놓인 섬돌)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이다. 회랑으로 둘러싸고 평평한 돌을 깐 근정전 앞마당이 바로 조정(朝庭)이다. 남쪽 회랑에 근정문(勤政門)을 두었고 그 바깥에 다시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으며, 외행각 남쪽에는 흥례문(興禮門)을 내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근정문 바깥 영역을 철저히 파괴했으나, 2001년에 흥례문과 외행각, 영제교 등을 복원하여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근정전은 국보 제223호, 근정문 및 행각은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 흥례문 ]
[ 영제교 ]
[ 근정문 ] [ 근정전 ] 왕세자는 새로 떠오르는 해처럼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내전의 동쪽에 거처를 배치하고 이를 동궁이라 불렀다. 서쪽의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던 내전이고, 동쪽의 비현각(丕顯閣)은 공부를 하며 정무도 보던 외전에 해당한다. 남쪽의 춘방(春坊) 터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이, 계방(桂坊) 터에는 의전과 경호를 담당하던 익위사가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부속 관청들이 있었다. 조선 초에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으며, 궐안에 동궁전으로 자선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1427년(세종 9)이다. 몇 차례 소실을 거친 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어 1867년에 재건된다. 일제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개최를 핑계로 1914년에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했다. 이 건물들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국정이 행해지던 곳
왕실 업무를 위한 관청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1911년에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일제는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파괴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2010년에는 광화문이 원형복원되었다.
경복궁 바깥을 두른 담장의 길이는 2,404m에 달하고, 평균 높이는 5m, 두께는 2m 정도이다. 담장의 사방에는 4대문을 만들고, 1426년(세종 8)에 건춘문(建春門-동), 광화문(光化門-남), 영추문(迎秋門-서), 신무문(神武門-북)이라 이름 붙였다. 이는 각각 봄-여름-가을-겨울과 나무-불-쇠-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운데 자리한 근정전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전통적인 오행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3개의 홍예문이 나 있는 높은 석축 위에 중층의 문루가 높이 앉아 있는 장려한 건물이다. 전면 담장의 두 끝 모퉁이에는 망루인 동십자각(東十字閣)과 서십자각(西十字閣)을 세워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추었다.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고, 동십자각은 도로 확장으로 인해 담장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궐 밖의 길 한가운데 홀로 서 있게 되었다.
사정전은 왕의 공식적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그 이름에는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사정전 좌우에 있는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은 온돌방을 갖추어 사계절 이용이 가능한 보조 편전이다. 조선초기에 이 건물들은 복도로 연결되었으나, 고종 때에는 독립된 건물로 만들어졌다. 만춘전은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88년에 복원했다. 사정전 앞의 행각은 왕실 재물을 보관하는 내탕고로 이용했다. 사정전은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을 궐외각사라 하고, 궁궐에 들어와 있는 관청들은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근정전 서쪽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교서관 등은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정치 행정기구였다. 내반원, 상서원, 상의원, 사옹원, 사복시 등은 왕족의 생활과 활동을 보좌하던 실무 관서였다. 흠경각, 보루원, 관상감, 간의대 등은 천문과 시각을 관측하는 과학 부서였고, 도총부, 내병조, 선전관청, 충장위 등은 궁궐 수비와 왕족 경호를 맡은 군사 부서였다. 궐내각사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정전은 세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쓰였던 곳이다. 1867년 수정전은 왕의 출입이 빈번하여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정면에 월대를 두었다. 수정전은 일상 집무공간으로 사용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내각 본부인 군국기무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궐내각사는 수정전 앞 빈 터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완전히 철거되었다. 수정전은 보물 제176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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